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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새만금간척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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Zone 3
한국의 간척

한국의 간척실은 한반도에서 이뤄진 간척의 사례를 연대기적으로 살펴볼 수 있는 공간이다. 고대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한국의 간척은 자연환경과 지리적 조건, 시대적 배경, 사회·경제적 상황 및 목적 등에 맞춰 다양한 양상으로 이뤄져 왔다. 고대 이래로 줄곧 전통적인 농업국가가 형성되어 오면서 점차 늘어나는 인구와 식량 수요 증가에 대응하여 농경지를 확보하기 위해 간척이 행해졌다. 근대에 들어서는 도시화·공업화에 따른 인구 성장과 지리적 집중이 심화되면서 간척이 활성화되었다.
역사적 흐름에 따라 기술과 역량이 발전하고 경험이 축적되어 간척의 방법 또한 끊임없이 진보하였음을 확인할 수 있다.

  • 01. 한국의 고대 수리시설
  • 02. 고려시대의 간척
  • 03. 조선시대의 간척
  • 04. 일본의 토지수탈
  • 05. 일제감정기의 간척
  • 06. 선전과 정당화
  • 07. 도시,항구,철도
  • 08. 보릿고개를 넘어서
  • 09. 대단위 농업종합개발과 산업단지 조성

전시구역안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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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한국의 고대 수리시설
간척사업의 기원은 농경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인구가 증가함에 따라 식량 수요도 늘 어났고, 이를 충족시키기 위한 새로운 경지가 필요해져 간척이 진행되었다. 한국은 전통 적인 농업국가로, 개간에는 수리시설의 확충이 필수였다. 수리시설의 기원은 신석기시 대 만들어진 소규모 집수시설이나 관개수로, 이후 하천을 막아 물을 가두는 보洑, 대규 모 저수지 등에서 찾을 수 있다.
02고려시대의 간척
한국의 간척에 관한 기록은 고려시대부터 보인다. 1232년 고려조정이 몽골의 침략에 항전 을 결의하고 강화도로 천도하면서 본격적인 간척이 시작되었다. 당시 몽골군을 피해 왕족, 귀족을 비롯한 수많은 백성들이 강화도와 그 인근의 섬으로 피난하게 되었다. 이로 인한 인구 증가와 경지면적의 부족으로 해안지역에 제방을 쌓아 농지를 확장하였다.
03조선시대의 간척
조선 초기에는 왜구와 해적이 자주 출몰하여 약탈을 일삼았기 때문에 해안지역의 간척이 활성화될 수 없었다. 이에 왜구의 침입에 대비하고 나머지 기간에는 영농에 종사할 수 있 도록 둔전을 조성하였다. 점차 사회가 안정되면서 해안 일대가 토지 확대를 위한 기회의 땅으로 인식되었다. 규모가 큰 간척사업의 경우는 대부분 국가에서 시행하였고, 하안河岸 과 도서지방의 소규모 간척인 경우에는 민간에서 개인 노비 등 사적 노동력을 동원하거 나 공동으로 계를 조직하여 간척하기도 했다.
04일본의 토지수탈
일본은 대한제국 시기부터 한반도의 황무지 개발을 시도했다.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 은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1841~1909)를 대한제국에 파견하고 ‘을사늑약’을 강제로 체결하였 으며, 통감부를 설치해 내정을 장악하였다. 당시 대한제국은 외국인들이 토지를 매입하는 것을 허가하지 않았지만, 일본인들은 불법적으로 토지를 사들였다.
통감부는 이러한 일본 인들의 토지 소유를 법적으로 인정받을 수 있도록 1906년 「토지가옥증명규칙」, 「토지가 옥전당집행규칙」, 1907년 「국유미간지이용법」, 1908년 「토지가옥소유권증명규칙」 등을 제정했다.
05일제감정기의 간척
정책적 지원과 일본인 대지주 및 기업가들의 이해관계가 맞물리면서 대규모 간척과 토지개량사업이 활발하게 진행되었다. 자본과 기술력이 우세했던 일본인들에 비해 조선인은 공유수면매립면허 면적에서 열세를 보였다. 하지만 면허 획득 건수에서는 앞섰 는데, 이를 통해 식민지 상황에서도 적극적으로 간척에 임하고자 했음을 알 수 있다.
06선전과 정당화
일제는 각종 엽서·사진·책자 등을 수단 삼아 식민지 지배를 정당화하고, 통치 성과를 적극적으로 선전했다. 특히 대규모 수리시설의 설치와 간척사업은 식민지 조선의 발전 을 보여주는 대표 사례로 자주 이용되었다. 3·1운동 직후 제3대 총독으로 취임한 사이 토 마코토齋藤實(1858~1936)는 지방 순시를 통해 반일 경향을 감시하면서 식민통치의 정당 성을 홍보했다.
07도시,항구,철도
일제는 식민지 조선에 대한 원활한 지배와 대륙 침략을 위해 철도와 항구, 도시를 건설했 다. 철도에 의한 수송의 신속화와 저렴화는 산미증식계획을 뒷받침하는 기반이었다. 대규 모 수리시설의 설치와 간척사업으로 증산된 미곡은 철도를 통해 인천, 부산, 군산, 진남 포, 목포, 원산 등 각지의 항구로 수송되어 일본으로 이출되었다.
08보릿고개를 넘어서
국권 회복 이후에는 귀속농지와 적산敵産에 대한 관리가 주요 현안이었다. 일본인이 남기고 간 물자와 미국경제협력국의 원조로 영단營團 및 수리조합연합회의 미완공 사업지구를 중심으로 간척을 포함한 농지개량사업이 속개되었으나, 큰 진전은 없었다. 게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 한국전쟁이 발발하였고, 종전 이후에야 국제연합한국재건단이 나서면서 수리시설의 복구와 정비를 비롯한 다양한 경제회복사업이 펼쳐졌다.
09대단위 농업종합개발과 산업단지 조성
1970년대와 1980년대에는 대단위 농업종합개발사업을 진행하였다. 종전의 농지개발은 농 지개량조합에 의한 단일목적사업이었기에 다소 산발적으로 진행되어 투자 효과가 분산 되었다. 이에 농업진흥공사가 시행 주체가 되어 하천 수계를 단위로 19개 지구 23만 ha에 대한 농지조성사업(개간·간척 등)과 농업기반조성사업(농업용수개발, 배수개선, 경지정리 등)을 부수적 사업(농업기계화, 도로 및 농로 확충, 농촌전화 등)과 연계하는 종합개발 방 식으로 전환하였다.
전시 주요사진
전시 주요유물
반계수록

한국, 조선, 1770년
유형원(1622~1673)

속수증보 강도지

한국, 일제강점기, 1932년
박헌용(1882~1940)

전라남도 해남군 화원농장
국유미간지 출원지 전도

한국, 대한제국, 1909년

충청남도 서산군 근흥면 정죽리
공유수면매립사업계획 평면도

한국, 일제강점기

전라북도 안내서

한국, 일제강점기, 1930년경

한국토지개량사업의 진로

한국, 1959년
농림부 농지관리국

간석지 기본조사보고

한국, 1961년
농림부 중앙수산시험장

동진강 수리간척사업 건설지

한국, 1969년
건설부 토지개량조합연합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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